선교

1.미국선교
저희 평화장로교회는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의 선교를 위하여 힘쓰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미국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뜻을 헤아리고 미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50개 주의 복음화를 위하여 온 성도가 기도의 프레임에 의하여 기도하는 것은 물론 저희 교회의 주변에 있는 한인 리스트를 확보하여 각 가정에 복음의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봄과 가을에 1년에 2번씩 자연 탐사 예배를 드립니다. 미국의 각 곳의 아름다운 명소에 가서 그지역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리고 그 곳에서 교회 주변의 이웃에게 편지쓰기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2. 선교사 후원
평화장로교회는 다음과 같은 지역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들을 협력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코스타리카- 이성수 선교사.

감비아- 한병희 선교사

필리핀- 최종삼 선교사

네팔_ 텍타파 선교사

3. 평화장로교회 전도지 모델들:

모델 1.

좋아함(liking)과 사랑함(loving)

이것은 마틴 로이드 존슨이 구분한 사랑의 구분 방법이다. 그는 세상의 사랑의 개념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의 특별함을 구별해 내기 위하여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을 구분한다. 세상에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원인이시며, 사랑의 원천이시고, 사랑 그 자체(love itself)이신 하나님의 사랑만이 있을 뿐이며, 이 하나님의 사랑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것은 단지 본능적으로 습득하게 된 ‘좋아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아함(liking)은 사랑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고 본능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능 속에 지니고 있는 자연적인 것이 좋아함이다.
좋아함 속에는 인간의 노력의 행위가 들어가지 않는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육체가 지니고 있는 본능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는 것이 좋아함이다. 그러므로 좋아함은 육체적인 것이고, 지식이 필요 없는 것이며, 자연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지적인 조작이나 지능의 사용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동물의 세계에서 이 좋아함의 근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모든 동물은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 본능에 의해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자연적으로 구분해 낸다. 그러므로 그러한 차원에서 좋아함을 생성해 내는 데에는 전혀 다른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그 누구의 힘에도 의존하지 아니하고, 그 어떤 지식에도 의존하지 아니해도, 본능에 의해 자동적으로 좋아함과 싫어함을 구분해 내는 것이다. 이 동물적인 본능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좋아함이다.
그러므로 좋아함은 인간의 인격의 가장 중심 되는 내면의 세계에 결코 들어갈 수가 없다. 그것은 피상적인 것이고 외모와 색깔과 온도와 행동 매너리즘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자기와 코드가 맞음으로 생성되는 것이 좋아함이다. 일종의 육체적인 감화력, 육체의 요구를 만족시켜주는 것이 좋아함이다. 오늘 날의 젊은 남녀가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며, 좋아하면 사랑하고, 싫어지면 헤어지는 것은, 서로의 상대에 대해 인격 깊이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영혼 깊이에 들어가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고 좋아함의 코드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자연적이고 본능적으로 습득된 좋아함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함 (Loving)이란 무엇인가? 칼빈에 의하면 인간은 완전히 부패하였다.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본성의 완벽한 탁월함이다. 그것은 훼손 이전에 아담 안에서 빛나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적으로 손상되고 더렵혀져서 타락이후에 혼돈과 불완전과 질병 외에는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말한다. 칼빈의 말대로 인간이 타락하고 부패하여서, 냄새나고 죄의 질병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그래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그리고 자연적으로 아무 매력이 없다할지라도, 그 사랑할 가치가 전혀 없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또 자연적으로 그들을 좋아할 만한 조건들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건들의 장벽을 뛰어 넘어서 그 사람의 인격과 만나고 그 참된 실체를 이해한 후에, 그를 좋아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이것을 사랑함(loving)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과 더불어서 사용되어질 수 있는 용어이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나님께서 비로소 창조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그 사랑의 창시자, 그 사랑의 발원지인 하나님을 제쳐놓고서는 참된 사랑을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 4:8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God is love)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것을 필요로 하신다”(God needs to love)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을 필요로 하신다. 영원부터 하나님은 사랑 속에 계셨고 사랑하시면서 존재하셨다. 하나님은 그 본질이 사랑이시면서, 그의 사랑을 베풀고, 또 사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며 존재하는 사회적인 존재이시다. 그의 형상을 닮은 인간도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사회적인 존재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필요로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의 욕구가 그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게 만들었고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그들에게서 사랑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도 하나님처럼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해야만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상호교제 속에서 사랑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운명인 것이다. 그러면 이 하나님으로부터 발원한 사랑의 특징은 무엇인가? 소위 사랑함(loving)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고도의 지능적인 측면을 내포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있어서 인간의 본능은 철저하게 배격되어진다. 하나님의 사랑에 있어서는 본능보다 지적이고 이성적이며 이지적인 측면들이 더 강조된다. 사랑은 좋아함과 같이 본능적인 것이거나 자연적인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의 인격의 중심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가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 잠을 깨우고 의식을 만들어내며 행동(action)을 일으키게 하는 요인이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그것을 가장한 피상적이고 가시적이며 육체적이고 외모적인 좋아함의 거짓된 장벽을 철저하게 부서뜨린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들의 배후에 있는 진실 된 인격의 세계로 깊이 침투해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받을 가치가 전혀 없으며, 그에게 전혀 무가치한 인간을 사랑하셨다. 그들의 내면, 영혼 깊숙이 들어오시고 그들의 상태를 아셨으며, 그들의 필요를 아신 것이다. 우리의 비참한 운명과 우리의 죄악 됨을 그가 아셨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의 행동을 취하셨다.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피를 흘리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치료하셨으며, 영생에 이르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그 본질이 매우 이지적(intelligent)이고, 사고적(thoughtful)이며, 이해적(understanding)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별력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지적인면에서 먼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도출해 내야한다. 그리고 그의 필요를 채워줘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지적인면에서 바라보는 사랑의 속성은 사랑의 대상자의 추함과 비 매력적인 것 이상을 바라보게 만들고, 그 사람의 인격 깊이에 들어가서 그 삶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필요를 채워주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에 참된 사랑은 오직 하나이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소위 좋아함의 영역에 해당하는 세상의 사랑들과는 분명하게 구분되어져야 한다.
위의 글은 <사랑과 영성>에서 뽑은 글입니다. 권병록 저, <사랑과 영성> CLC 출판사, 2011. PP. 137-142.

모델 2.
아가페 (Agape)

아가페는 그것의 명사인 ‘아가페’와 동사인 ‘아가파오’ 그리고 형용사인 ‘아가페토스’의 형태로 신약성경에 약 210회 사용되어졌다. 아가페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을 말한다. 아가페는 순수하고, 자기 헌신의 사랑을 표현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사랑함’에 해당하는 사랑이다.
아가페의 사랑은 감춰진 동기(ulterior motives)가 없이 주고(give), 희생하는(scarifies)사랑이다. 이것은 사랑의 대상자를 위한 최고의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비이기적이고 오래 참으면서 접근하고 목적을 이룬다. 이것은 모든 사랑들 중에서 가장 먼저의 우선권이 주어지는(the highest priority) 사랑이고, 성경의 중심된 사랑이다. 그리스천의 삶은 이 성경의 중심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빛내는(radiate) 삶이어야 한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아가페의 사랑이 다른 이유이다.
세상의 사랑의 정의는 그른 것이다. 세상의 사랑에 대한 잘못된 정의는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Love i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라고 말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였으므로 당신이 제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제가 입은 상처쯤은 제 스스로 극복할 수 있어요”의 뜻이다. 또는 “제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다 할지라도 결코 미안하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당신을 사랑했으니까요”라는 뜻이다. 사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대방에게 준 상처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다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먼저 구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결코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를 위한 완전하고도 오래 참는 사랑으로 전적으로 상대를 위한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랑이다. 이렇게 아가페의 사랑은 이기심이 없으며(selfless), 서로의 행복을 위하여 덕을 쌓아가는 사랑이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명사인 동시에 동사이다. 그것은 사랑과 관련한 행동이며, 결코 정적(static)이지 않다. 부부 간에 적용되었을 때, 이 사랑은 먼저 오래 참는다. 서로의 단점과 결점들을 참아가며 이해하고, 서로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리하여 부부간의 이혼진행을 촉진하지 아니하며 나로 인하여 나의 배우자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것에 방해가 되는 나의 결점, 둘 사이의 방해물들은 즉각적으로 고치고 허무는 행동을 취한다. 아가페의 사랑은 사랑의 대상자를 향한 선한의지, 존중의 의미를 나타내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가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소중히(존중) 여기며, 그래서 당신은 그의 행복에 맞게 행동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가페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또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에도 사용된다. 헬라시대에 이 용어는 헬라 사회에서 거의 사용되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의 크리스천들은 당시에 사용되던 일반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구분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 아가페를 선택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특별함을 강조하였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랑의 찬가를 노래하면서 전적으로 아가페를 사용하고 있다(고전 13장).
에로스(성적매력)와 우정(philia)은 다른 사람들의 자질(qualities)에 의존한다. 에로스는 한 여성을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 한 남성을 보고 느끼는 남성적인 매력, 이러한 서로의 만족감을 주어야 비로소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사랑은 항상 눈의 즐거움과 함께 시작된다. 그 눈은 처음에 아름다움에 의한 매력에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좋은 자질에 의존하는 사랑은 또한 그 자질들이 그 사람에게서 사라져버렸을 때, 쉽게 실망하고 쉽게 포기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많은 젊은이들이 승용차 뒷좌석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눈 후에 변명의 말을 늘어놓곤 한다. “미안해,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나의 감정에 따랐을 뿐이야!” 또 잠시 시간이 흐른 후에 이렇게 말한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요. 제 감정이 그렇게 하도록 시켰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필리아도 어떤 사람의 어떤 자질에 의존한다.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좋은 자질, 또는 자기와 맞는 코드로 인하여 그와 함께 우정을 세우고자하는 욕망이 생겨난다. 그리하여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정을 세워나간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어떤 환경이나 피할 수없는 사정 때문에 상황이 바뀌었을 때, 그래서 기대하던 자질들이 깨어지는 환경들이 발생하였을 때, 필리아도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수십 년을 끈끈한 우정으로 지내어 오던 친구 사이가 소원해지며, 더 나아가서는 원수 사이로 발전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아도 감정의 변화에 따라서 관계가 소원해 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가페는 사랑하는 사람의 의지에 의존한다. 아가페는 내가 상대방의 매력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를 사랑하기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사랑한다. 아가페는 어떤 사람의 행복의 측면에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아가페는 자신의 감정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황금률(Golden Rule)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행해주기를 바라는 바의 마음으로 당신이 그들에게 행동한다. 황금률은 마태복음 7장 12절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예수님은 당신을 부르셨다.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한 반응으로서 받은 만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도권을 쥐고 먼저 사랑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행해주기를 원하는 만큼, 먼저 그를 위하여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사랑은 습득되어져야하고 배워져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당신은 가장 순결하고, 가장 강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배우고 익혀야한다. 행동하라.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라.
나 자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상대방의 행복의 측면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가페의 사랑이다. 그런 사랑은 본능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함”에 해당하는 사랑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것을 배우며, 내 안에 간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다른 이에게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아가페는 명사이면서 동시에 동사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천할 수밖에 없는 행동의 사랑이다.

가장 높은 사랑에서 낮은 사랑으로

헬라어의 아가페가 비 이기적이고 헌신적이며 가장 높은 사랑의 단계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대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대신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에로스와 필리아 그리고 아가페가 서로 교차하며 사용된 구절들이 있기 때문이다. B.C 400년경에 아가페는 헬라어에서 중요성이 더해 갔다.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아가페의 의미가 점점 고귀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대표하는 언어로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그것의 초기 단계에서는 다른 언어와 구별 없이 사용되어진 예가 있다.
예를 들어서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본에서는 다윗의 아들 암논이 그의 이복 여동생이며 압살롬의 여동생인 다말을 유혹하여 강제로 관계를 맺고 난후, 그녀를 버리게 되는데, 이때에 암논의 정욕(lust)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단어가 ‘아가페’였다(삼하 13:1,4,15). 또 데마가 바울을 버리고 돌아갔을 때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라고 말하는데 이때 사용된 사랑은 아가페를 말한다(딤후 4:10). 그리고 요한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셨다”고 할 때에, 한번은 필레오, 한번은 아가페를 의미의 구분 없이 썼다(요3:35, 5:20).
바울은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24절 사이에 이 두 헬라어를 매우 밀접하게 가까이 쓰고 있다. 16장 22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의 결핍은 저주”를 가져온다고 했는데 필레오를 쓴다. 16장 24절에서 저자는 그들 모두를 위한 바울의 사랑을 말하는데 아가페를 쓴다. 이처럼 서로의 사용의 중첩으로 인하여 사랑의 정의를 정확히 단어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리아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가페와 동의어가 아니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중요한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 또 아가페는 자주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에 사용된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희생적인 신적인 사랑의 의미를 전달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정확하게 단어로 하나님의 사랑과 다른 사랑을 구분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마틴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함’(Loving)이라고 말하고 그 외의 것들은 ‘좋아함’(Liking)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아가페를 ‘가장 강한 사랑’, 그리고 필리아를 ‘조금 덜 강한사랑’, 그리고 에로스를 ‘가장 약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가장 강한 사랑,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표하는 아가페는 가장 높은 단계의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를 전달하지는 못하지만,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그 단어가 사용되어졌으며, 또 성경의 저자들이 세속적인 사랑과 구분하고자 특별히 아가페를 선택하여 표현한 부분이 있으므로 우리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아가페’라고 부를 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분명한 구분은 “하나님의 사랑”(the love of God)으로 부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히브리어 개념의 아가페는 구약성경에서 정열, 성적유혹, 우정, 복종, 충성, 의무, 다른 사람에 대한 약속 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아가페의 사랑은 형체 없는 거룩한 사랑만 지칭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우리의 모든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디모디 젝슨(Timothy Jackson)은 “아가페는 다른 모든 사랑의 종류에 단독의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랑은 원인적으로 다른 사랑을 앞서며, 지식적으로 다른 사랑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그는 ‘에로스’, ‘우정’, ‘희생적 사랑’, 그리고 ‘자기사랑’(self-love)의 네 종류의 사랑을 말하면서 이들 사랑들은 따로 따로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모두가 아가페의 열매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들 사랑들은 화해할 수 없는 경쟁자로서 아가페에 전적으로 단절되고 그것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가페의 적절한 열매로서 나타나며, 아가페로부터 성장해 나오는 것들이다.
우리 안에는 에로스, 스트로게, 필레오, 그리고 자기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랑의 감정들이 존재한다. 이들 사랑의 감정을 가장 강력하고 높은 단계인 ‘아가페’ 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스리고 다듬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이며, 사랑의 대상자의 완전한 행복을 위해 행동하는 사랑의 실천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과 우리의 파트너들과 이웃들을 가장 강력한 사랑(아가페)으로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스피크(Spicq)는 아가페(agape)는 “사랑의 실천”으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하는 이 아가페의 가장 강한 사랑으로 다른 연약한 사랑의 단계들을 다스리면서 이 땅에서 부단히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사랑과 영성> 중에서.

모델 3.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오늘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7가지 질문과 답)

Q 1. 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A.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입니다.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죄를 지으며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Q 2. 죄를 지은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A. 모든 인간은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지옥에 갑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모든 사람은 다 지옥에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든 사람들의 현재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그의 외아들인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그 아들인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천국에 가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Q 3.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갑니까?
A.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이것을 거듭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에 의하여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천국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볼 수 있고, 그리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거듭남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Q 4. 다른 길(다른 종교, 다른 방법들)은 없나요?
A. 예수님 외에는 다른 길이나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오직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그만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으로부터 배웠고 하나님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진리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인생을 살아가는 참된 목적을 알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인생의 참된 목적지인 천국으로 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모든 사람들은 그 인생의 참 목적도 모르고 목적지도 모르고 방황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Q 5. 구원을 얻는 방법은 어려운가요?
A. 우리가 구원을 얻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 속 깊이 받아 드리고 그리고 입으로 분명하게 시인해야 합니다. 다음의 내용을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십시오.
“예수님, 내 인생의 주님으로 받아들입니다. 제 안에 오셔서 내 구주가 되어주십시오.”
당신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셨다면 당신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10장9절.“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Q 6. 믿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A. 예수님과 같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목표는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받고 실천하며 그가 보여주신 사랑의 예를 실천하며 이 땅에서 거룩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Q 7.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A. 장래에 들어갈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바라보아야할 천국을 묘사한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십시오.

천국묘사 1. 권병록 저 <천국의 사계절: 봄 여름 가을 그리고 사랑> 기독교문서선교회 출판사. 2012

“저 밖을 보세요, 저 아름다운 아카시아 나무들과 저 푸른 종려나무들, 그리고 저 푸른 산들을 보세요. 천국은 저 자연보다도 훨씬 푸르고 때 묻지 않은 순결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저 건물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장래에 들어갈 새 예루살렘 성에는 저런 건물들이 다이아몬드와 진주와 황금과 진귀한 보석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밝게 빛나게 될 그 보석들의 나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 아스팔트들이 천국에서는 유리처럼 빛나는 황금으로 덮여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천국에서는 나무도 꽃들도 그리고 시냇가의 모래들도 황금색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평소에 생각하던 천국의 모습을 그에게 부연 설명하였다. 그의 믿음을 키우고 천국의 존재를 확신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나는 온 들판에 만발한 양귀비꽃들을 상상하였다. 랭케스터 파피꽃 보존지역에 황금의 꽃물결을 이루며 순결하게 피어있는 황금의 꽃밭들을 생각하였다. 어쩌면 천국의 새로운 세계에서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더 아름답고 진귀한 자연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황금의 나무들과 황금의 꽃들과 황금빛깔의 잔디들로 만발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 상상에 젖어서 흥분되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 아름다운 천국에 꼭 들어가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천국백성의 의로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백성에게 요구되는 의로움의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회개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 마음에서 복수의 마음, 싸우고 미워하는 마음, 마약을 즐기는 것과 술 취함과 갱단에 가입하는 그런 나쁜 생활들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시민에게 요구되는 하나님 나라의 의로움입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힘을 주어 그의 복잡할 것 같은 인생의 문제들의 핵심부분들을 정면으로 공격하였다. 그리고 그의 두 손을 꼭 잡고 의를 위한 삶을 살 것을 당부하였다. 그는 감격에 겨운 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코리언-맥시칸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메시지입니다. 이런 메시지는 처음 들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쩌면 그의 몸에서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에 그는 처음부터 나에게 말씀을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는 같은 민족으로서의 어떤 연민의 정을 느끼며 늦은 8월의 푸른 신록 속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한참 동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국묘사 2. 권병록 저 <사랑과 영성>기독교 문서선교회 2011.
요나단 에드워든 “하늘나라는 사랑의 나라”라고 말한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가 가장 충만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그가 영원히 거하시면서 그의 영광을 영원토록 드러낼 장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사랑의 나라가 된다. 하나님은 그 본질이 사랑이시며, 또한 사랑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거하는 곳에는 그의 사랑이 흘러나온다. 마치 태양이 빛의 원천이 되면서 그것에서 빛이 흘러나오듯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천국은 사랑으로 넘쳐나는 곳이다.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달콤하다. 이 세상에서 조차 사랑은 달콤하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인간의 사랑을 상상해 보라. 가슴은 뛰고 우리의 모든 생각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중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항상 그리워하고 함께 있기를 원하며 그와의 사랑의 교감을 나누기를 원한다. 그것은 꿀보다도 더 달콤하고 항상 우리로 그것을 향하게 만든다.
천국에 있는 사랑도 그러하다. 그것은 이 땅의 사랑보다 더 달콤하고 아름답다. 하나님으로부터 달콤한 꿀샘과 같은 사랑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며 바다처럼 무한하게 흘러나올 것이다. 천국의 성도들은 영광의 하나님 주위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마시고 즐거워할 것이다. 마치 이른 봄날의 산천초목이 가슴을 열고 햇빛을 맞이하며, 햇빛에 목욕하듯이, 하늘의 성도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서 가슴을 열고 사랑의 빛으로 한없이 채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으로 천국의 모든 동산을 채울 것이며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사랑을 쏟아 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름다운 사랑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진실 된 사랑으로 서로를 높이며 참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바울은 천국을 사모하는 자들은 위엣 것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골3:1).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천국에 두고 살라는 직접 명령이다.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천국에 고정시키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눈을 고정시킬 수 없다. 또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에게로 고정시키지 않고서는 우리는 우리의 눈을 천국에 고정시킬 수 없다. 우리가 고정시켜야 할 것은 그리스도와 위엣 것(천국)이다.
헬라어의“마음을 고정시키다”는 제테오(zeteo)이다.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철학적 추구”를 뜻한다. 복음서에 같은 용어가 사용된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마18:12)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여인”(눅15:8) “귀한 진주를 찾는 상인”(마13:45)의 경우에 사용되어졌다. 이러한 찾는 행위들은 부지런하고 활동적이며 일편단심의 찾음이다. 그러므로 “위엣 것을 찾으라”는 말은 부지런히 활동적으로 찾으며, 한 마음으로 천국을 소망하라는 것이다.
동사 제테오(Zeteo)는 현재시제다. 천국을 추구하는 것을 계속 지속하는 과정을 뜻한다. 단순히 한번 설교 듣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책 한번 읽고 끝내거나, 한 번의 대화의 주제로 삼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적극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꼭 가고 싶은 열망으로 천국을 사모하고 추구하라는 것이다. 당신이 정말 천국에 가고 싶다면 서로 사랑하라. 천국은 사랑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가진 자만이 갈수 있다.
그리고 사랑의 가장 우선되는 속성은 겸손이다.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며, 부풀리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상대를 높이고 존경하는 마음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면, 당신은 겸손해야 한다. 우리의 주님이 하늘의 자리, 높은 자리를 버리고 죄인의 자리로 낮아지신 것처럼, 섬기는 자로서 오신 것처럼, 또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고 명령을 주신 것처럼, 사랑은 겸손에서 우러나온다. 그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 누리면서도 마치 자신이 큰일을 이룬 것처럼 자기의 업적을 치켜세우며,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려는 교만을 저지를 자가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은 종이 그 주인에게 항상 종이면서 주인의 시중을 들고 오직 주인만 높이는 것처럼, 항상 낮아지는 자세, 겸손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과 업적을 통하여, 그리고 사랑의 위대한 실천을 통하여 주님만 높아지고 주님의 영광만이 나타나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을 가까이 하며 사랑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은 천국 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